중앙종회 소개
아주신씨 역사
중앙종회 사업
사랑방
족 보
류범휴(柳範休)의 호곡집(壺谷集)
형태서지
권수제
호곡집(壺谷集)
판심제
간종
목판본(木版本)
간행년
1900년 간행
권책
14권 7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19.2×17.2(cm)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D1-A7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100
저자
성명
유범휴(柳範休)
생년
1744년(영조 20)
몰년
1823년(순조 23)
자
천서(天瑞)
호
호곡(壺谷)
본관
전주(全州)
특기사항
김강한(金江漢),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이완(李埦), 이우(李㙖), 남한조(南漢朝) 등과 교유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영조
20
1744
갑자
乾隆
9
1
7월 25일, 安東府 臨河縣 水谷里 大坪에서 태어나다.
36
1760
경진
25
17
2월, 義城金氏 金江漢의 딸과 혼인하다.
40
1764
갑신
29
21
2월, 본생 조부 陽坡 柳觀鉉의 상을 당하다. ○ 7월, 黃山文會에 참석하다.
41
1765
을유
30
22
윤2월, 虎溪書院에서 열린 大山 李象靖의 「대학」 강회에 참석하다.
43
1767
정해
32
24
8월, 鄕解 兩試에 합격하다.
44
1768
무자
33
4월, 모친상을 당하다.
48
1772
임진
37
3월, 이상정이 내방하여 枕澗亭에서 「중용」 首章과 「西銘」을 강의하다. ○ 4월, 아우 柳玄休와 함께 高山精舍에 가서 이상정에게 수학하다.
52
1776
병신
7월, 이상정이 “立志居敬 致知力行 剛健中正 含弘光大” 16자 旨訣을 써주다. ○ 11월, 艮巖 李埦이 내방하다. ○ 周王山 寂照庵에서 독서하다.
정조
1777
정유
42
34
4월, 이상정이 내방하다. ○ 6월, 이상정에게 「논어」에 대하여 품의하다. ○ 12월, 장남 柳魯文이 태어나다.
3
1779
기해
3월, 장인 金江漢의 상을 당하다.
4
1780
경자
45
2월, 생원시에 합격하다. 강화도 마니산을 유람하다.
5
1781
신축
46
38
12월, 이상정을 곡하다.
6
1782
임인
47
39
3월, 차남 柳鼎文이 태어나다.
8
1784
갑진
49
1월, 義城 騰雲山 孤雲寺에서 后山 李宗洙, 川沙 金宗德 등과 「大山集」을 교정하다. ○ 11월, 재종숙 三山 柳正源이 편찬한 「易解參考」를 水晶山 福地寺에서 교정하다.
1785
을사
50
3월, 부친의 別業인 蘆厓土室에서 독서하다. 泰陵 參奉이 되다. ○ 〈蘆原雜錄〉을 짓다.
10
1786
병오
51
10월, 부친에게 「심경」에 대하여 품의하다. ○ 12월, 사옹원 봉사가 되다.
11
1787
정미
봄, 〈泮村問答〉을 짓다. ○ 이완과 함께 樊巖 蔡濟恭을 만나 이상정의 묘갈에 대하여 상의하다.
12
1788
무신
53
2월, 高陽 圓塘洞의 선조 檜軒 柳義孫의 묘에 참배하다. ○ 5월, 平市署 直長이 되다. ○ 10월, 「퇴계집」을 읽다.
13
1789
기유
54
5월, 陶庵 兪漢人, 立齋 鄭宗魯와 「주자서절요」를 강독하다. ○ 9월, 이완을 곡하다. ○ 12월, 의금부 도사가 되다.
14
1790
경술
55
5월, 松禾 縣監이 되다. ○ 9월, 東堂 差備官에 차임되어 新溪에 가다.
15
1791
신해
56
6월, 벼슬을 그만두다. ○ 8월, 부친상을 당하다.
1793
계축
58
3월, 俛庵 李㙖가 내방하다. ○ 장남 유노문을 이완의 둘째 딸과 혼인시키다.
18
1794
갑인
59
사복시ㆍ장악원 주부, 昌陵ㆍ厚陵 令이 되다.
19
1795
을묘
60
7월, 高城 郡守가 되다.
1796
병진
嘉慶
2월, 함경도 관찰사 李秉鼎을 수행하여 금강산을 돌아보다. ○ 5월, 이종사촌 損齋 南漢朝와 종질 柳晦文이 내방하다. ○ 7월, 郡庠을 수리하고 향음주례를 행하다. ○ 8월, 季父 東巖 柳長源의 부음을 듣다. ○ 차남을 金熙天의 딸과 혼인시키다.
1797
정사
2
12월, 安邊 府使가 되다.
1800
경신
57
3월, 병으로 귀가하다. ○ 9월, 殯殿 進香官에 차임되다.
편찬및간행
저자는 선조 柳城이 淸溪 金璡의 사위가 되어 安東 水谷[무실]에 입향한 이래 세칭 ‘무실유씨’로 불리며 영남에서 가장 많은 문집을 간행한 全州柳氏 水谷派의 일원으로 慵窩 柳升鉉, 陽坡 柳觀鉉, 蘆厓 柳道源, 東巖 柳長源 등 선대 가학의 영향을 받고 蘭谷 金江漢, 大山 李象靖의 문하에서 도야하여 영남 남인의 학맥을 이은 학자이다.
저자의 차남 柳鼎文(1782~1839)은 저자의 家狀을 완성하지 못하고 졸하면서 저자의 재종손 定齋 柳致明(1777~1861)에게 撰次하여 줄 것을 유언하였다. 이후 유치명이 1843년에 지은 행장에는 저자의 호 ‘壺谷’이 저자가 살던 瓠谷[박실]에서 연유하였음 을 밝히면서 저자의 유문에 대해서는 “有文集若干卷藏于家”라 하였으므로, 행장을 지은 1843년 이전에 유문이 문집의 형태를 갖추어 家藏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현전하는 저자의 문집에는 序跋 등이 없어 간행 주체나 경위를 알 수 없지만, 부록 의 연보 말미 기사에 “上三十七年庚子刊行文集”이라고 하여 경자년인 1900년에 간행 되었음 을 명기하였다. 또한, 조부 유승현의 「慵窩集」, 본생 조부 유관현의 「陽坡 集」, 부친 유도원의 「蘆厓集」 등 선대의 문집이 저자의 문집과 비교하여 볼 때 체재와 판식이 유사한 상태로서 간행 연도는 미상인데 통상적인 의례상 저자의 문집이 간행된 1900년 이전에 순차적으로 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79), 규장각(古3428-131), 성균관 대학교 존경각(D3B-2171),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811.98/유범휴)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밖에 安東水柳文獻刊行會에서 1984년에 초간본을 저본으로 영인하여 「全州柳氏 水谷派之文獻叢刊」 8권에 수록 간행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900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 본이다.
年譜, 行狀(柳致明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14권 7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 총목록이 있다.
권1~7은 詩(11題), 書(250)이다. 권1 앞부분에 수록된 시 가운데 〈贈南姨兄宗伯〉은 1796년에 종질 柳晦文과 함께 관동팔경을 거쳐 고성 임지로 찾아온 이종사촌 南漢朝가 금강산 기행을 떠날 때 지어 준 것이다. 〈春日亭居卽事〉는 1803년 부인상 중의 소회 를 읊었고, 〈山月〉에서는 독서 수행의 의지를 다졌으며, 말미에 金啓運의 만시가 있다. 편지는 스승, 벗, 후학, 친척의 순서로 인물별로 실었으며, 인물 내에서는 편년하였다. 일상적인 안부 편지 외에 대부분 성리학의 이론에 대한 논변과 강론이 주된 내용이다.
권1은 스승 李象靖, 金江漢에게 보낸 21편이다. 이상정에게는 문하에 입문한 소감을 적고 초심을 잃지 않겠다며 1772년에 보낸 것을 비롯하여 1776년에 저자를 격려하여 써 준 16자에 대한 의미를 정리하면서 평생의 旨訣로 삼겠노라 다짐한 것이 있는데, 16자 지결의 전수는 수곡파 문인들이 학봉계열의 퇴계학맥을 발전시켜 나가는 진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논어」에 대해 품의한 것과 성리설에 대한 내용이 있다. 김강한에게는 거처를 옮긴다는 소식을 듣고 보낸 안부 편지가 있다.
권2는 蔡濟恭, 丁範祖, 尹弼秉, 李益運, 具㢞, 蔡弘遠, 李宗洙, 金宗德, 金鎭東, 金道行, 鄭宗魯, 李重祖, 權訪, 李㙖, 權以復, 李埦 등 선배 학자와 사우 16인에게 보낸 31편이다. 채제공에게 조부 유승현의 묘갈명에 贈職 기사를 補入하여 줄 것을 청한 것과 정범조 에게 부친 유도원의 묘갈명을 받고 보낸 것이 있다. 이종수에게 이완의 죽음을 슬퍼하면 서 이상정의 문집 편찬에 대하여 중지가 결집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우려하며 1790 년에 보낸 것, 이우에게 이상정이 제기한 ‘心無出入說’의 해석에 대하여 논한 것이 있고, 이완에게는 1789년에 보낸 별지에서 ‘性體道用’의 문제로 논란한 것이 주목되는데, 이는 이상정의 ‘率性之謂道說’의 해석을 둘러싼 대산학파의 여러 학자들 사이에 가장 치열한 논쟁으로 꼽힌다.
권3은 金㙆, 金宗發, 李之恂, 金宗燮, 金佑良, 南漢朝 등 6인의 동문 사우에게 보낸 29편이다. 김굉과 김종발에게 高山書院의 洞主로 있던 1811년에 이상정의 紙牌行祀에 대해 의논한 것이 있고, 남한조에게는 ‘성체도용’에 대하여 논쟁한 것과 ‘심무출입설’에 대하여 ‘無內外限說’을 주장하는 남한조와 ‘心’이 ‘內’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是內非 外說’의 논리를 전개하며 논쟁한 것이 있다.
권4는 金始器, 李周楨, 李仁行, 金熙紹, 金熙奮, 南漢皜, 徐活, 金顯奎, 李秉運, 金養觀, 申大重 등 30인의 후학에게 보낸 51편이다. 이인행에게 이황과 조목의 설에 의거하여 人心道心圖를 그려 1806년에 보낸 것, 남한호에게 ‘심무출입설’과 ‘人物性同異論’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 있다.
권5는 泗濱書院 儒生, 朴冕中, 李東協, 李晦慶, 徐元模, 李源祚, 黃㶅 등 후학에게 보낸 29편이다. 사빈서원 유생들에게 1819년에 「심경」을 통독하게 한 후 金會運, 李海永, 柳廷杰 등의 문목에 답한 것, 박면중에게는 「대학」ㆍ「중용」ㆍ「논어」의 각 조목에 대한 질의에 답한 것, 이회경에게는 「대학」에 대한 질의와 ‘存心’에 대한 문목에 답한 것이 있다.
권6은 족제 柳簡休, 柳程休, 柳健休와 족질 柳台煥, 柳洛文, 柳炳文, 柳徽文, 柳廷杰, 柳田文, 柳遠文과 족손 柳致翊, 柳致球와 족증손 柳羲鎭, 柳箕鎭, 柳家鎭 등 柳門의 후학 16인에게 보낸 32편이다. 족제 유건휴에게는 고산서당에서 「대산집」에 실린 ‘率性之 謂道說’, ‘一性具四德說’, ‘心無出入說’ 三說을 강의한 후 문목에 답한 1811년의 高山講 錄이 있고, 족질 유태환에게는 「대학」, 족질 유전문에게는 「맹자」와 「중용」의 문목에 답한 것이 있다.
권7은 부친 柳道源, 계부 柳長源, 종형 柳星休와 柳川休, 아우 柳洛休와 柳玄休, 재종손 柳致明, 아들 柳魯文과 柳鼎文 등 가족에게 보낸 57편이다. 부친 유도원에게 「심경」에 대하여 1786년에 품의한 것이 있고, 재종손 유치명에게 ‘情本善’, ‘浩氣’, ‘人心惟危’, ‘道心惟微’, ‘驗未發氣象’, ‘冥漠中照管’ 등 6조에 대해 강론한 것이 있다.
권8은 雜著로 〈湖上記聞〉이다. 安東府 一直縣 蘇湖里를 오가며 이상정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견문한 학설을 바탕으로 성리학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묻고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권9는 雜著(8)이다. 〈泮村問答〉은 李埦과 ‘性’과 ‘道’ 등 성리학에 대하여 토론했던 내용을 1787년에 정리한 것으로 이완의 「艮巖遺稿」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이때 金㙆과 權訪도 토론에 참여하여 권방의 「鶴林集」에는 〈泮村謾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索居或問〉은 성리학의 개념에 대해 자문자답한 것을 모았으며, 〈蘆原雜錄〉은 태릉 참봉으로 있을 때 「심경」, 「근사록」, 「사문간독」을 공부하고 실생활에 ‘敬’을 적용하면서 기록한 것이고, 〈拙修雜錄〉은 觀省의 자료로 삼고자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일을 차록한 것이다. 〈三過說〉은 사람의 허물은 말, 몸, 마음을 잘못 사용하는 데서 생기며 그중 마음의 허물을 없애는 것이 가장 어려우므로 ‘敬’ 공부로 이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고, 〈奴心說〉은 마음[心]은 天君인데 천한 노예[奴]가 천군의 위에 자리 잡아 ‘怒’가 되면 하늘과 땅이 뒤바뀐 형상이 되므로 항상 마음이 주재가 되어야 ‘怒’를 없앨 수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書示兒姪〉은 자손들에게 爲己之學에 힘쓸 것을 당부하며 1801년 병중에 쓴 것이다. 〈鄕校講會後牓諭諸生文〉은 안변 부사로 있던 1798년 가을에 「대학」을 강론하고 나서 서북지역 선비들의 자질이 다른 지역에 못지않다고 격려하고 「대학」의 가르침을 體行한 후 학문의 폭을 넓혀가도록 권면한 것이다.
권10은 序(4), 記(4), 識跋(11), 上樑文(1)이다. 서는 金楷의 「負暄堂文集」, 柳敬時의 「涵碧堂集」, 松塢 李軫의 연보, 羅州丁氏 족보에 대한 것이다. 기는 徐爾亮이 靑松에 세운 學窩, 趙相述이 安德縣 瑟谷에 세운 動悔窩, 1812년에 정려된 申吉煥의 처 安東權氏의 정려비, 裵寅吉과 그의 처 月城李氏의 충렬을 기린 奉化의 雙節閣에 대한 것이다. 지발에는 水谷 岐陽書堂에서 화수회를 연 후에 작성한 「岐陽宗會錄」, 柳崇祖의 「大學綱目箴」과 「性理淵源撮要」, 저자가 교감하여 1818년에 鏡光書院에서 간행한 張興孝의 「敬堂先生續集」, 權大器의 「忍齋先生實記」, 金燁ㆍ金煜ㆍ金燦의 「三烈士遺蹟」, 申之孝의 「鷹巖實蹟」 등에 대한 것과 柳致明과 南漢皜가 人物性에 대해 왕복 토론한 것을 읽고 유치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쓴 것이 있다. 상량문은 卓光茂ㆍ卓愼 부자를 제향하기 위하여 星州에 梧溪祠를 세울 때 지은 것이다.
권11은 祝文(5), 祭文(8), 墓誌銘(3), 墓碣銘(4), 墓表(5), 行狀(3)이다. 축문은 慶林書院에 金誠一, 陶淵書堂에 金是榲, 龍溪書院에 權大器, 龜巖里社에 金近, 용계서원 別廟에 權寏을 봉안할 때 지은 것이고, 제문은 金江漢, 李象靖, 李宗岳, 金熙說, 金㙆, 처 義城金氏, 장남 柳魯文에 대한 것이다. 묘지명은 이상정, 朴煟, 申活에 대한 것이고, 묘갈명에는 權啓夏의 처 眞寶李氏, 柳錫龜, 權斗徵에 대한 것과 柳柔의 墓碣後追記가 있다. 묘표는 柳大時, 柳達時, 申世圾, 申必濟, 黃㶅에 대한 것이고, 행장은 金江漢, 鄭仁涵, 金夏九에 대한 것이다.
권12는 행장(6), 遺事(2)이다. 행장은 鄭煒, 金宗發, 柳㰒, 柳洛文, 趙相述, 申致達에 대한 것이며, 유사는 柳義孫, 柳鳳休에 대한 것이다.
권13은 附錄으로 年譜이다. 1744년 출생부터 1900년 문집 간행 기사까지 실려 있다.
권14는 附錄으로, 金仁行, 金是瓚, 李頤淳, 姜世綸, 姜必孝 등이 지은 輓詞(14), 호계ㆍ사빈서원과 고산서당의 유생, 李野淳, 李秉遠, 姜橒 등이 지은 祭文(11), 柳致明이 1843년에 지은 행장, 金興洛이 지은 묘갈명이 실려 있다.